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코 바레시 (문단 편집) ===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국가대표 경력]] === 국가대표팀 커리어도 상당히 다이나믹하다. [[UEFA 유로 1980]]에 만 20살의 나이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국제 메이저 대회에 데뷔하지만, 동 포지션에는 이미 '''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{{{#1e489c 아주리 군단}}}]]'''에는 당대 최고의 리베로인 [[가에타노 시레아]]가 있었다.[* 우리 시대로 치면 제법 뛰어난 공격전개와 훌륭한 수비력을 보여 주는 유망주가 아주리 군단에 데뷔했는데 하필이면 경쟁 상대가 키엘리니인 격.] 이후 [[1982 FIFA 월드컵 스페인|1982년 스페인 월드컵]]에도 참가하지만, [[엔초 베아르초트]] 감독의 선택은 당연히 절정의 기량을 펼치는 시레아였고, 바레시는 조국의 44년 만의 3번째 우승을 후보로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. 이때 당시 만 20세가 안된, 훗날 당대 최고의 파워 디펜서로 이름을 떨치며 대표팀에서는 바레시와 파트너였고, 인테르에서만 뛴 레전드인 [[주세페 베르고미]]가 브라질 전에서 강렬한 월드컵 데뷔를 하여 결승전까지 뛰며 우승의 한 축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에겐 상당히 아쉬울 따름이다. [[UEFA 유로 1984]]에서는 자국인 이탈리아가 애초에 본선을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가고[*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1984년 아주리 군단의 [[A매치]] 데이터를 보면 [[가에타노 시레아]]와 프랑코 바레시가 동시 기용된 경기도 종종 있다. 시레아가 리베로 포지션. 바레시가 수비형 미드필더의 포지션이었다. 표면상 포지션은 이렇게 나눠져 기용되긴 했으나 어쨌든 둘 다 리베로형의 선수들이었다. 한팀에 더블 플레이메이커도 힘든 판국에 더블 리베로라니. 지금은 옛날 같은 위상이 아니라지만 여로모로 수비 강국 이탈리아의 위엄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.], [[1986 FIFA 월드컵 멕시코|1986년 멕시코 월드컵]]에서는 바레시 자체가 시레아가 공고한 대표팀에 들어가서 후보를 하기를 좀 꺼린 것도 있었고, [[엔초 베아르초트]] 감독도 이런 바레시를 굳이 불러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 엔트리에 탈락한다. 그리고 1986년 월드컵 이후 베아르초트 감독과 시레아가 국가대표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바레시의 국가대표 인생도 본격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다. 이 당시의 바레시는 20대 중후반의 절정의 나이였고, [[밀란 제너레이션]]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. 척 보면 딱 아는 후배 [[파올로 말디니]]도 국가대표에서 중용되면서 [[UEFA 유로 1988]]에 당당히 주전으로 참가하고 자국에서 열리는 대망의 [[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|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]]에서는 골키퍼 [[발테르 쳉가]], 센터백에 바레시와 리카르도 페리 조합 그리고 좌우 풀백에 [[파올로 말디니]]와 국가대표 주장인 베르고미[* 리카르도 페리와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징을 보여주었다. 다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통한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.]라는 말도 안 되는 진형으로 단일 월드컵 최장기간 무실점. 517분 연속 무실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다. 하지만 아주리는 [[디에고 마라도나]]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그들의 최초의 실점이자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했고, [[승부차기]]에서 패배하여 [[3위 결정전]]으로 내려가서 3위로 대회를 마무리하고 만다.[* 그 대회 챔피언인 서독은 5승 2무였고, 3위 팀인 이탈리아는 6승 1무였다. 단 한 번의 무승부가 우승을 좌절시킨 셈.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, 압도적인 수비라인과 자국 버프, 그리고 서독의 지독한 [[아주리 징크스]]를 생각하고 이탈리아가 결승전에 진출했다면 그들의 4번째 우승은 16년 일찍 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.] 그리고 바레시는 대회 베스트에 선정되었다. [[UEFA 유로 1992]]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지만, 지역 예선 도중 당시 주장이었던 [[주세페 베르고미]]가 자신의 교체 투입에 불만을 품고 비신사적인 태클을 함으로써 국대에서 사실상 강제 은퇴 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주장직을 수행한다.[* 하지만 베르고미는 [[1998 FIFA 월드컵 프랑스|1998년 프랑스 월드컵]]을 앞두고 국가대표에 복귀한다. 주전인 [[치로 페라라]]가 부상으로 대회 엔트리에 이미 제외가 확정된 상황에서 혹시나 하는 상황을 위한 후보로서 뽑힌 것이었는데, 조별예선에서 [[알레산드로 네스타]]가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노장인 베르고미가 대체로 뛰게 된다.] 이후 [[1994 FIFA 월드컵 미국|1994 미국 월드컵]]에서 주장으로 나선 바레시는 조별리그 2차전 노르웨이전에서 부상을 당한다. 이후 아주리 군단은 [[로베르토 바조]]의 크레이지 모드와 잔루카 팔리우카, [[파올로 말디니]], [[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]] 등이 혼신의 방어를 펼쳐 기어코 결승전에 오른다. 준결승전에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뛰지 못하였지만, 바레시는 결승전에서 복귀한다. 이때 [[1994 FIFA 월드컵 미국/결승|결승전]]으로 보면 바레시는 엄청난 퍼포먼스로 브라질의 공격을 차단한다. 바레시가 보여준 엄청난 수비력은 단연 압권. 경기를 보다 보면 바레시에게 완전히 막힌 [[호마리우]]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. 어찌나 퍼포먼스가 대단한지 상대적으로 말디니의 활약이 작아보일 정도였다. 결승전 자체가 하나의 바레시 스페셜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. 이런 혼신의 수비 때문이었을까?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big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ffffff 실축 후 좌절하는 바레시 }}}'''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expertfootball.com/1994_2a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ffffff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허탈해하는 바조와 바레시 }}}''' || 결승전 [[승부차기]]에서 첫 키커로 나서지만 실축하고 만다.[* 사실 연장 종료 직전에 다리 경련으로 실려나가기까지 했다. 이런 상황에서 바레시를 첫번째 키커로 투입한 [[아리고 사키]]의 결정이 의문이지만, 아마도 주장으로서 분위기를 가지고 오라는 의미였을 듯. 실제로 [[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|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]] 4강 아르헨티나전 승부차기 당시에도 첫번째 키커는 바레시었다.] 하지만 당시 [[디에고 마라도나|마라도나]]조차 우위를 점하기 힘든 [[로베르토 바조]]의 맹활약을 봐왔던 팬들은 바조의 실축을 보게 되고, 바레시의 실축은 그대로 잊혀졌다.[* 참고로 바조는 [[페널티 킥]] 최강자라 불릴만큼 냉철한 판단력을 무기로 한 덕에 [[페널티 킥]]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. 문제는 중요한 무대에서...][* 우리나라로 치면 [[2002 FIFA 월드컵 한국·일본]] 8강전 승부차기 때 [[주장]]인 [[홍명보]]와 공격의 중심인 [[황선홍]]이 실축한 것과 똑같다.] 바조의 실축 이후에 얼굴을 감싸 안고 서럽게 우는 바레시를 보고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슴 아파했다. 그리고 1994년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